○ 게송모음집을 마치며…

 

영원한 조실,

전강스님!

송담스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한국불교의 불꽃이자 바른 안목이셨던 전강스님이 가신 지도 벌써

4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전강스님이 고구정녕 말씀하시던 것이 씨앗이 되어 이 땅위에 승속을 막론하고 활구참선법을 믿고또 실참실구하는 선객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다 정법에 대한 전강스님의 확고한 안목과 원력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제 화룡점정이라부처님에게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법등(法燈)을 환히 밝히는 도인들이 무수히 나와 전강스님의 위대한 공덕과 원력이 더욱 더 빛을 발하기를 기원하면서전강스님의 일화를 소개하며 게송모음집을 마칩니다

.

 

 

<전강스님 일화 1>

 

성우스님이 전강스님을 모시고 중풍 걸리신 고봉스님 병문안을 갔다.

전강스님이 고봉스님께 물었다.

전강스님병고가 어떠십니까?

고봉나는 못 이르겠네자네 전강이 이르소어떤 것이 병고인가?

전강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죽겠네!

고봉과연 전강일세나는 못 미치겠네.

 

<전강스님 일화 2>

 

6.25 시절 전강스님께서 하꼬방 장사를 하고 계셨다.

그때 친분관계가 있던 오씨의 조카가 군인이었는데 휴가를 왔다가 어머니 죽고아버지 죽고,

딸이 죽은 것을 알고는 환장해서 탈영을 하려고 전강스님께 말하였다.

“내가 숨을라니까 나를 좀 감춰주십시오”

“내가 어떻게 감추나감춘 사람까지 혼난다는데.”

“아따,

그렇지만 곧장 잡으러 오니까 절대 비밀로 좀 해 주십시오.”

“나는 모른다나는 그런 일 안한다국민이 돼서 도피를 하다니,

군인이 전장에서 죽는 게 옳지.”

그러나 그 군인은 “그저 믿습니다” 하면서 빈집에 숨었다.

전강스님께서 정보부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저기 저 집에 도피한 군인이 있으니 잡아가시오.

잡아다가서 영창에만 넣지 말고 그저 정성스런 충성군인만 만들어 주시오.

내말 꼭 그대로 해주시오” 하였다.

정보부 사람이 그 말을 듣고서는 군인을 잡아가지고는 영창을 보내지 않고 바로 군대로 보냈다.

그 군인은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얼마 있다가 그 군인에게 “감사합니다도피했다가 잡혀 와서 군인으로 잘 있습니다” 하는 감사편지가 왔다.

전강스님께서 아래와 같은 답장을 썼다.

 

군()이여,

이별도 가벼우며 떠남도 무정하다.

오군(吳君)

떠날 적만 하여도 무등산 적설(積雪)이 보이더니 

벌써 춘심(春心고원에 도화가 피고,

청초(靑草평야에 어린 소녀 나물 캐며 노래 부르고,

강남천리 오는 제비 춘색을 희롱한다.

왕복무제(往復無際)요 동정일원(動靜一源)이라,

천겁불고(千劫不古)요 만세장금(萬歲長今)이니

나아가라싸워가라,

오군(吳君)

목적지는 오직 남북통일일 것이다.

깃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붓을 놓는다.

 

부대의 상관이 이 편지를 보고는, “이글을 누가 썼느냐”고 물어,

군인이 “하꼬방 장사하는 하는 분이 썼다”고 하자 물팍[무릎]을 치면서 감탄하며 말하기를

“참두고두고 이글을 봐라내가 안줄려다가 너를 준다” 하고 편지를 주었다.

후에 그 군인이 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전강영신 대종사 행장 약록

(田岡永信 大宗師 行狀 略錄)

 

 

선사는 189811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 제산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 응해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선사를 찾아가자 한암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 길로 만공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啟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선재선재(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수행 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無非法 (비법무비법)   법도 아니요 법 아님도 없느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 없는 것 또한 무심(無心)이더라.

   此日秋色多 (차일추색다)   이 날 가을빛이 많이 있어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 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113(음 갑인년 122)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정우(正愚)정무(正無)정대(正大)정락(正樂) 50여명과 손상좌 200여명이 있다. 저서로는전강법어집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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