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송모음집을 마치며…

 

영원한 조실,

전강스님!

송담스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한국불교의 불꽃이자 바른 안목이셨던 전강스님이 가신 지도 벌써

4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전강스님이 고구정녕 말씀하시던 것이 씨앗이 되어 이 땅위에 승속을 막론하고 활구참선법을 믿고또 실참실구하는 선객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다 정법에 대한 전강스님의 확고한 안목과 원력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제 화룡점정이라부처님에게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법등(法燈)을 환히 밝히는 도인들이 무수히 나와 전강스님의 위대한 공덕과 원력이 더욱 더 빛을 발하기를 기원하면서전강스님의 일화를 소개하며 게송모음집을 마칩니다

.

 

 

<전강스님 일화 1>

 

성우스님이 전강스님을 모시고 중풍 걸리신 고봉스님 병문안을 갔다.

전강스님이 고봉스님께 물었다.

전강스님병고가 어떠십니까?

고봉나는 못 이르겠네자네 전강이 이르소어떤 것이 병고인가?

전강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죽겠네!

고봉과연 전강일세나는 못 미치겠네.

 

<전강스님 일화 2>

 

6.25 시절 전강스님께서 하꼬방 장사를 하고 계셨다.

그때 친분관계가 있던 오씨의 조카가 군인이었는데 휴가를 왔다가 어머니 죽고아버지 죽고,

딸이 죽은 것을 알고는 환장해서 탈영을 하려고 전강스님께 말하였다.

“내가 숨을라니까 나를 좀 감춰주십시오”

“내가 어떻게 감추나감춘 사람까지 혼난다는데.”

“아따,

그렇지만 곧장 잡으러 오니까 절대 비밀로 좀 해 주십시오.”

“나는 모른다나는 그런 일 안한다국민이 돼서 도피를 하다니,

군인이 전장에서 죽는 게 옳지.”

그러나 그 군인은 “그저 믿습니다” 하면서 빈집에 숨었다.

전강스님께서 정보부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저기 저 집에 도피한 군인이 있으니 잡아가시오.

잡아다가서 영창에만 넣지 말고 그저 정성스런 충성군인만 만들어 주시오.

내말 꼭 그대로 해주시오” 하였다.

정보부 사람이 그 말을 듣고서는 군인을 잡아가지고는 영창을 보내지 않고 바로 군대로 보냈다.

그 군인은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얼마 있다가 그 군인에게 “감사합니다도피했다가 잡혀 와서 군인으로 잘 있습니다” 하는 감사편지가 왔다.

전강스님께서 아래와 같은 답장을 썼다.

 

군()이여,

이별도 가벼우며 떠남도 무정하다.

오군(吳君)

떠날 적만 하여도 무등산 적설(積雪)이 보이더니 

벌써 춘심(春心고원에 도화가 피고,

청초(靑草평야에 어린 소녀 나물 캐며 노래 부르고,

강남천리 오는 제비 춘색을 희롱한다.

왕복무제(往復無際)요 동정일원(動靜一源)이라,

천겁불고(千劫不古)요 만세장금(萬歲長今)이니

나아가라싸워가라,

오군(吳君)

목적지는 오직 남북통일일 것이다.

깃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붓을 놓는다.

 

부대의 상관이 이 편지를 보고는, “이글을 누가 썼느냐”고 물어,

군인이 “하꼬방 장사하는 하는 분이 썼다”고 하자 물팍[무릎]을 치면서 감탄하며 말하기를

“참두고두고 이글을 봐라내가 안줄려다가 너를 준다” 하고 편지를 주었다.

후에 그 군인이 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전강영신 대종사 행장 약록

(田岡永信 大宗師 行狀 略錄)

 

 

선사는 189811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 제산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 응해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선사를 찾아가자 한암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 길로 만공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啟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선재선재(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수행 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無非法 (비법무비법)   법도 아니요 법 아님도 없느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 없는 것 또한 무심(無心)이더라.

   此日秋色多 (차일추색다)   이 날 가을빛이 많이 있어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 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113(음 갑인년 122)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정우(正愚)정무(正無)정대(正大)정락(正樂) 50여명과 손상좌 200여명이 있다. 저서로는전강법어집 이 있다.

 

 

 

 

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노라.

만일 만에 하나라도 도리에 맞지 않은 구절이 있다면

내가 잘못들은 것이다.

                                                   -편집자-

 

 

<일러두기>

 

1. <법문게송 모음집>은 전강대종사께서 설하신 법문게송을 모은 것입니다.


2. 전강대종사께서는 게송을 해석하실 때 자구(字句) 하나하나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대의만 밝혀 놓으시는 경우가 많이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 법문제목 앞에 •로 표시된 것은 <게송이 없는 법문>이란 표시입니다.


4. 한글 해석은 전강대종사의 녹음법문 중에서 취하였습니다. 해석하시지 않은 게송은 송담스님의 게송해석을 따르고 궁서체 글꼴로 표기하여 ‘송담스님의 해석’임을 나타냈습니다.


5. 송담스님의 게송해석도 없는 것은 편집자가 해석을 하였고 ‘시인과 나’ 글꼴로 표기하여 ‘편집자의 해석’임을 나타냈습니다.


6. 편집자의 능력부족으로 한자음을 완벽히 달지 못한 곳이 있고, 해석이 불완전한 곳이 있습니다. 이런 불완전한 곳은 별표★로 표시하였고, 차후에 교정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7. 오류가 발견되면 즉시 수정보완하여 보다 완전한 ‘법문게송 모음집’을 만들려 합니다.

                                                                                  2016. 3. 27 편집자 합장

 

 

<차 례>


전강대종사 법문게송


No. 1(70.09.16)


<법문 한마당>

 제석천왕이 가지지 못한 3가지 보물(三般物)   No.006

 유재(有在) 부재(不在)   No.029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No.030

풍류를 읊으시면서 도반을 찾아가시다.   No.033

사불범정(邪不犯正)   No.034

만공 한암스님 서신문답   No.046

삼세심도불가득   No.047

국창 임방울의 제일구(第一句)   No.058

조계일적수(曹溪一適水)   No.105

강사(講師)의 게송   No.153

떡장수 노파의 깨침   No.164

제일구(第一句)   No.165

유견유지(有見有地)   No.171

능엄경 사약장(四若章)   No.172

이뭣고?   No.179

예배하는 법   No.190

청매조사 십무익송   No.194

임제보화스님 법거량   No.203

제자의 스승 제도   No.210

양변(兩邊)   No.274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은   No.280

내게 있는 보물   No.281

육대 선지식에 한몫 인가를 받다 “달다”   No.284

혜봉스님과의 법거량   No.300

만나기 어렵다   No.312

대승계(大乘戒)   No.329

무주상(無住相)   No.338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  No.339

말산요연 비구니   No.384

 부처님과 가섭존자와 나   No.425

일체가 각()   No.428

부중선사도덕 불위아설파(不重先師道德不爲我說破)   No.458

태고보우 국사의 참선명(參禪銘)   No.475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일러라   No.493

고봉스님의 술   No.504

부처님의 삼불능(三不能)   No.507

마설(魔說)   No.552

김성근 대감 이야기   No.554

홍도비구 이야기   No.566

반기이파(飯器已破)   No.583

전강대종사 오도 기연   No.586

술잔 법문   No.597

초당파 법문   No.598

체중현(體中玄)   No.600

척사현정방(斥邪顯正棒)   No.601

※ 현중현(玄中玄) 법문 –송담스님-  No.601

전강대종사 개당설법(開堂說法)   No.604

가짜 선지식   No.608

참부처는 어디에…  No.617

부모미생전에 입은 옷   No.620

성인이 미워하는 것   No.625

조달의 지옥고   No.627

불설(佛說)과 마설(魔說)   No.639

이렇게 해도, 이렇게 하지 않아도   No.695

 법문 청법 공덕   No.706

불법(佛法)과 세법(世法)이 둘이 아닌 도리   No.711


No. 723


•게송모음집을 마치며…


•전강영신 대종사 행장 약록

……게송모음집을 마치며……

 

 

<일화 한마당 1>

송담선사께서 세등선원 법회(세등36)에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처 일체시에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는 것이, 일월성진과 산천초목과 삼라만상과 두두물물이 누구의 모습이며, 누구의 소식이냐 그 말이여, 어째서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그게 남인 줄 알고 따로 찾을 것이냐 이말이여……

화두를 놓친다고?

의심이 안난다고?

화두를 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바로 말하면, 화두를 놓치기가 어려운 거여하시다.

(이 말씀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일화 한마당 2>

용화사에서 황구()’진실이()’를 비롯한 여러 마리 진돗개를 키웠는데, 숫놈들이 암놈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우고

암놈은 숫놈들한테 도도하게 굴기도 하고, 오솔길을 함께 데이트하기도 하며, 서로들 요란하게 살았는데

그 모습을 송담선사께서 보시고 용화사는 개판이다하시며 박장대소 하시다.

 

<일화 한마당 3>

송담선사께서 껌을 저작하셔서 입상(立像) 달마상과 가사를 수하시고 좌선하는 달마상과 불상 등을 조성하시다.

어떤 분이 그것을 보고 이건 기네스북감이다!” 하고 감탄함.

 

<일화 한마당 4>

송담선사께서 언젠가 용화사 법당에서 어느 영가의 49재 법문을 하시는데……

어느 유명한 구참 스님이 갑자기 할()을 하니, 송담선사께서 그 자리에선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법문을 마치시고는 방으로 내려오셔서 사시공양을 드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 아까 소리 지른 놈이 누구냐? 거 미친 놈 아니냐?” 하고 점검하시다.

 

<일화 한마당 5>

송담선사께서 2012부처님오신날에 인천 용화사 학생회, 청년회가 주최한 야외무대 공연을 관람하시고 마이크를 드리자,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영원히 젊어라!” 하고 내려오시다.

 

<일화 한마당 6>

성우스님이 처음 중 되러 왔는데 송담선사께서 보시고는 글을 한 수 읊으셨다.

네 마음에 귀를 기울여라. 자기 자신 속에 스승을 지닌 사람은 신념이 있는 사람이다. 남이 나를 깎아내리더라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그릇된 판단이나 시기 질투에서 오는 것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의 말을 참고로 하되 자기 스승의 심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바른 길이요 삶이니라.

 

<일화 한마당 7>

송담선사께서 영동 중화사 주지로 계실 때, 마산 군의(軍醫) 학교에 면회를 오셨다. 성우스님이 외박증을 끊어서 송담선사를 모시고 여관에서 잤다. 다음날 송담선사께서는 중화사로 가셨다. 그 후에 엽서가 왔다.

대한 혹설의 날씨에 잘 있느냐? 멀리 찾아갔으나 아무 할 말 없이 산중으로 돌아왔다. 대중도 모다 잘 계신다.

네가 인생의 바른길을 찾기 위해 수도의 고행을 택했다가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고 군문에 들어갔으나, 언제나 궁극의 본지(本旨)는 굳게 간직한 가운데 현실에 부닥친 책임과 의무를 완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른 길이요 삶이니라.

 

<일화 한마당 8>

송담선사께서 정견(正見)스님한테 무증(無證)이란 당호를 주시면서 이와 같이 법문하셨다.

"무증정견(無證正見)... 증할 바 없는 것이 정견이다, 증할 바가 없어야 정견이다."

 

<일화 한마당 9>

제일구 상신실명(第一句 喪身失命)몸 죽고 명 잃었다 그렇게 하면 안되고, 그냥 상신실명(喪身失命)’이라고 해야 된다고 송담선사께서 상신실명(喪身失命)’에 대해 점검하셨다.

 

<일화 한마당 10>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문득 콧구멍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돈각삼천시오가(頓覺三千是吾家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인 줄을 몰록 깨달았다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岩山下路유월 연암산 아래 길에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들사람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 구나.

 

이것은 경허스님의 오도송인데, 이 오도송에 대해 전강대종사께서 점검하시기를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岩山下路)까지는 경허스님 송구 그대로 놔두고, 그 밑에 한 귀만 제가 놓것습니다하시니 만공스님께서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岩山下路)에 한마디 이르소하셨다. 전강대종사께서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하셨는데 만공스님께서 , 여여로 상사뒤여~ 의지(意旨)가 여하(如何)하시니 전강대종사께서 보기 좋게 춤을 추면서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하셨다. 이에 만공스님께서 적자(嫡子)가 농손(弄孫)일세하셨다.

후일에 적자농손(嫡子弄孫)에 대해 운석스님이 적자 만공스님이 손자 전강스님을 희롱했다고 하자 성우스님이 그럴 수가 있냐고 분개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성천스님이 송담선사께 이 모든 내용을 말씀드리자 운석이도 틀렸고 성우도 틀렸고, 성천이 너도 틀렸다. 그냥 적자농손(嫡子弄孫)이라고 해야 된다고 점검하셨다.

 

 

<송담선사 게송>

 

송담선사께서 불국사 조실로 계시던 월산(月山)스님의 열반식에 참석하러 가시는 도중에 송담선사를 모시고 가던 용화사 성조스님에게 차 안에서 적어주신 만사(輓詞).

 

월침불국(月沈佛國) 달이 불국에 지니

산적수잔(山寂水潺) 산은 고요하고 물은 졸졸 흐르는구나

성덕무변(聖德無邊) 성스런 덕이 가이없으니

림하유인(林下有人) 숲 아래 사람들이 있구나.

 

 

 

   송담정은  선사  행장  약록

(松潭正隱 禪師 行狀 略錄)

 

스님은 1927824()에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리에서 박일규(朴日圭)를 부친(父親)으로 이 금강심을 모친으로 하여 태어나셨다. 속명은 박종삼(朴鍾參)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시고 늦게 학교에 들어가셨다.

1945년 광주 서중 졸업식 날 이발소에서 삭발하고 출가를 결행하여, 이 해에 광주 무등산 자운선원(紫雲禪院)에서 전강선사를 은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으셨다.

이후 수년간 전강선사를 모시고 광주 계림동 경양방죽가에서 낮엔 하꼬방 장사를 하며 정진하고 밤에는 좌선하셨다.

10년 묵언정진 끝나던 해인 1957년(31세)에 담양 보광사에서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하시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전강선사께서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치고 나서는 흔연히 인가를 하시니, 경허 만공 전강으로 이어지는 불조의 제78대 법맥을 이으셨다.

 

전강선사께서 도봉산 망월사 조실로 계시던 1960년에 정식으로 스님에게 송담(松潭)이라는 법호와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시고 이를 대중에게 공표하니 전법게는 이러하였다.

 

   非法無非法 (비법무비법) 법도 아니요 법 아님도 없느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 없는 것 또한 무심(無心)이더라.

   此日秋色多 (차일추색다) 이 날 가을빛이 많이 있어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 구름이 날더라.

 

스님은 이후 오랜 동안 탄광, 어촌 등으로 몸을 숨기시고, 전국의 여러 기차역과 버스정류장의 변소와 그 주변청소를 하기도 하셨으며, 서산 방조제를 막는데 일꾼으로 일하기도 하시면서, 그 가운데 투철히 보림수행(保任修行)을 하셨으니 이른바 성스런 태를 오래 오래 기른다[長養聖胎]’라 함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후 1970년에 수원 용주사 주지를 역임하셨으며, 1975년1월(음,갑인년12월 )에 전강선사께서 열반에 드시니 뒤를 이어 용화사 선원장으로 취임하시고 현재까지 법을 널리 펴고 계신다.

 

언젠가 누가 왜 스님이 되셨습니까?” 하고 질문을 드린 적이 있는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얼까! 세상 모든 것은 무상하다. 사람들은 평생토록 잘 살기 위해 고생 고생하지만 끝내는 환상과 꿈을 간직한 채 죽어가니, 결국엔 나도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가? 하는 고뇌 때문에 출가했다"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하는 물음에 담담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고플 때는 밥 먹고, 곤할 때는 잠자고, 손님들이 올 때는 같이 이야기 하면서 웃기도 하고, 손님들이 떠나면 조용히 지냅니다.

 

 

송담선사께서 설하신

법문게송 모음집 (별책부록 게송색인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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