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송모음집을 마치며……

 

 

<일화 한마당 1>

송담선사께서 세등선원 법회(세등36)에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처 일체시에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는 것이, 일월성진과 산천초목과 삼라만상과 두두물물이 누구의 모습이며, 누구의 소식이냐 그 말이여, 어째서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그게 남인 줄 알고 따로 찾을 것이냐 이말이여……

화두를 놓친다고?

의심이 안난다고?

화두를 들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바로 말하면, 화두를 놓치기가 어려운 거여하시다.

(이 말씀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일화 한마당 2>

용화사에서 황구()’진실이()’를 비롯한 여러 마리 진돗개를 키웠는데, 숫놈들이 암놈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우고

암놈은 숫놈들한테 도도하게 굴기도 하고, 오솔길을 함께 데이트하기도 하며, 서로들 요란하게 살았는데

그 모습을 송담선사께서 보시고 용화사는 개판이다하시며 박장대소 하시다.

 

<일화 한마당 3>

송담선사께서 껌을 저작하셔서 입상(立像) 달마상과 가사를 수하시고 좌선하는 달마상과 불상 등을 조성하시다.

어떤 분이 그것을 보고 이건 기네스북감이다!” 하고 감탄함.

 

<일화 한마당 4>

송담선사께서 언젠가 용화사 법당에서 어느 영가의 49재 법문을 하시는데……

어느 유명한 구참 스님이 갑자기 할()을 하니, 송담선사께서 그 자리에선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법문을 마치시고는 방으로 내려오셔서 사시공양을 드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 아까 소리 지른 놈이 누구냐? 거 미친 놈 아니냐?” 하고 점검하시다.

 

<일화 한마당 5>

송담선사께서 2012부처님오신날에 인천 용화사 학생회, 청년회가 주최한 야외무대 공연을 관람하시고 마이크를 드리자,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영원히 젊어라!” 하고 내려오시다.

 

<일화 한마당 6>

성우스님이 처음 중 되러 왔는데 송담선사께서 보시고는 글을 한 수 읊으셨다.

네 마음에 귀를 기울여라. 자기 자신 속에 스승을 지닌 사람은 신념이 있는 사람이다. 남이 나를 깎아내리더라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그릇된 판단이나 시기 질투에서 오는 것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의 말을 참고로 하되 자기 스승의 심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바른 길이요 삶이니라.

 

<일화 한마당 7>

송담선사께서 영동 중화사 주지로 계실 때, 마산 군의(軍醫) 학교에 면회를 오셨다. 성우스님이 외박증을 끊어서 송담선사를 모시고 여관에서 잤다. 다음날 송담선사께서는 중화사로 가셨다. 그 후에 엽서가 왔다.

대한 혹설의 날씨에 잘 있느냐? 멀리 찾아갔으나 아무 할 말 없이 산중으로 돌아왔다. 대중도 모다 잘 계신다.

네가 인생의 바른길을 찾기 위해 수도의 고행을 택했다가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고 군문에 들어갔으나, 언제나 궁극의 본지(本旨)는 굳게 간직한 가운데 현실에 부닥친 책임과 의무를 완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른 길이요 삶이니라.

 

<일화 한마당 8>

송담선사께서 정견(正見)스님한테 무증(無證)이란 당호를 주시면서 이와 같이 법문하셨다.

"무증정견(無證正見)... 증할 바 없는 것이 정견이다, 증할 바가 없어야 정견이다."

 

<일화 한마당 9>

제일구 상신실명(第一句 喪身失命)몸 죽고 명 잃었다 그렇게 하면 안되고, 그냥 상신실명(喪身失命)’이라고 해야 된다고 송담선사께서 상신실명(喪身失命)’에 대해 점검하셨다.

 

<일화 한마당 10>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문득 콧구멍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돈각삼천시오가(頓覺三千是吾家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인 줄을 몰록 깨달았다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岩山下路유월 연암산 아래 길에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들사람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 구나.

 

이것은 경허스님의 오도송인데, 이 오도송에 대해 전강대종사께서 점검하시기를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岩山下路)까지는 경허스님 송구 그대로 놔두고, 그 밑에 한 귀만 제가 놓것습니다하시니 만공스님께서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岩山下路)에 한마디 이르소하셨다. 전강대종사께서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하셨는데 만공스님께서 , 여여로 상사뒤여~ 의지(意旨)가 여하(如何)하시니 전강대종사께서 보기 좋게 춤을 추면서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하셨다. 이에 만공스님께서 적자(嫡子)가 농손(弄孫)일세하셨다.

후일에 적자농손(嫡子弄孫)에 대해 운석스님이 적자 만공스님이 손자 전강스님을 희롱했다고 하자 성우스님이 그럴 수가 있냐고 분개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성천스님이 송담선사께 이 모든 내용을 말씀드리자 운석이도 틀렸고 성우도 틀렸고, 성천이 너도 틀렸다. 그냥 적자농손(嫡子弄孫)이라고 해야 된다고 점검하셨다.

 

 

<송담선사 게송>

 

송담선사께서 불국사 조실로 계시던 월산(月山)스님의 열반식에 참석하러 가시는 도중에 송담선사를 모시고 가던 용화사 성조스님에게 차 안에서 적어주신 만사(輓詞).

 

월침불국(月沈佛國) 달이 불국에 지니

산적수잔(山寂水潺) 산은 고요하고 물은 졸졸 흐르는구나

성덕무변(聖德無邊) 성스런 덕이 가이없으니

림하유인(林下有人) 숲 아래 사람들이 있구나.

 

 

 

   송담정은  선사  행장  약록

(松潭正隱 禪師 行狀 略錄)

 

스님은 1927824()에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리에서 박일규(朴日圭)를 부친(父親)으로 이 금강심을 모친으로 하여 태어나셨다. 속명은 박종삼(朴鍾參)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시고 늦게 학교에 들어가셨다.

1945년 광주 서중 졸업식 날 이발소에서 삭발하고 출가를 결행하여, 이 해에 광주 무등산 자운선원(紫雲禪院)에서 전강선사를 은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으셨다.

이후 수년간 전강선사를 모시고 광주 계림동 경양방죽가에서 낮엔 하꼬방 장사를 하며 정진하고 밤에는 좌선하셨다.

10년 묵언정진 끝나던 해인 1957년(31세)에 담양 보광사에서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하시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전강선사께서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치고 나서는 흔연히 인가를 하시니, 경허 만공 전강으로 이어지는 불조의 제78대 법맥을 이으셨다.

 

전강선사께서 도봉산 망월사 조실로 계시던 1960년에 정식으로 스님에게 송담(松潭)이라는 법호와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시고 이를 대중에게 공표하니 전법게는 이러하였다.

 

   非法無非法 (비법무비법) 법도 아니요 법 아님도 없느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 없는 것 또한 무심(無心)이더라.

   此日秋色多 (차일추색다) 이 날 가을빛이 많이 있어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 구름이 날더라.

 

스님은 이후 오랜 동안 탄광, 어촌 등으로 몸을 숨기시고, 전국의 여러 기차역과 버스정류장의 변소와 그 주변청소를 하기도 하셨으며, 서산 방조제를 막는데 일꾼으로 일하기도 하시면서, 그 가운데 투철히 보림수행(保任修行)을 하셨으니 이른바 성스런 태를 오래 오래 기른다[長養聖胎]’라 함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후 1970년에 수원 용주사 주지를 역임하셨으며, 1975년1월(음,갑인년12월 )에 전강선사께서 열반에 드시니 뒤를 이어 용화사 선원장으로 취임하시고 현재까지 법을 널리 펴고 계신다.

 

언젠가 누가 왜 스님이 되셨습니까?” 하고 질문을 드린 적이 있는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얼까! 세상 모든 것은 무상하다. 사람들은 평생토록 잘 살기 위해 고생 고생하지만 끝내는 환상과 꿈을 간직한 채 죽어가니, 결국엔 나도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가? 하는 고뇌 때문에 출가했다"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하는 물음에 담담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고플 때는 밥 먹고, 곤할 때는 잠자고, 손님들이 올 때는 같이 이야기 하면서 웃기도 하고, 손님들이 떠나면 조용히 지냅니다.

 

 

송담선사께서 설하신

법문게송 모음집 (별책부록 게송색인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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